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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ic Soul Food -외노자의 서재

헤어지는 중입니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서영이 엄마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중략>
나는 사과를 좋아하고 호도와 잣과 꿀을 좋아하고, 친구와 향기로운 차를 마시기를 좋아한다. 군밤을 외투 호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차알스 강변을 걸으면서 핥던 코온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중략>
나는 신발을 좋아한다. 태사신, 이름 쓴 까만 운동화, 깨끗하게 씻어 논 파란 고무신 , 흙이 약간 묻은 탄탄히 삼은 짚신,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    - 피천득 <인연>, 나의 사랑하는 생활 中-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열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읽으며 눈물이 났다. 너무 소박하고 별거 아닌 것으로 가득 찬 사랑스러운 하루,  지금 내가 가장 그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중입니다.

인연이라는 단어는 설렘과 동시에 아린 감정도 불러일으킨다. 왠지 인연 뒤에는 이별이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이나 보다. 살면서 인연과 이별이라는 단어를 주로 떠올린 건 단연코 사랑을 생각할 때였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 그렇게 정리된 인연. 친구와 직업도 그러하고 우리는 살아가는 만큼 이별의 수를 늘려가는 것 같다. 어떨 땐 무뎌지는 내 마음에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내가 요즘 가장 힘든 이별을 겪고 있다

 

내가 즐겨 가던 커피숍과 석양을 더는 즐길 수 없고, 쉬어 가라며 내어주던  그 나무의 그늘도 없고, 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논하던 친구가 지금, 이곳에 없다. 아끼던 물건들의 반 이상을 버려야 했고 가져온 물건도 떠오르는 추억 때문에 쉬이 볼 수가 없다. 요즘 나는 “ 내가 사랑하던, 나의 생활을 구성하던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과 이별하는 중이다.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직업이 없어 본 적도 있고, 삶의 공간과 터전을 바꿔 본 적도 있다. 팔을 다쳐본 적도 있고 믿었던 친구에게 실망한 적도 있다. 모두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나는 나의 적응력과 시간이 나를 다시 새로운 인연과 일상으로 안내하리라는 믿음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믿음만으로 이겨내기가 힘에 부친다.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내게 온 적은 없었다. 내 삶의 일부를 가져갔던 이별이 내 일상을 가져가자 내 삶이 없어진 기분이 들어 한없이 슬프다.

이렇게 나도 사라져 없어지려나... 

연극은 계속된다. 다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바뀔 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한 편의 영화나 연극으로 비유하곤 한다. 내게 시련이 올 때면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나 역시 “ 주인공이 너무 쉽게 살면 영화가 재미 없지! 그리고 결국, 주인공은 멋지게 극복하고 일어서잖아!” 라며 굵고 짧은 이 말을 하며 상황을 바라보는 내 시각을 바꿨다. 평안하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나를 그리 두지 않는 생을 탓만 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내 삶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등장의 이유가 있다. 내게 꼭 맞는 타이밍에 나타나 꼭 맞는 역할을 해주고 사라진다. 길 가다 멈춰 소리 지르고 싸웠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들었다. 미친 연애를 하며 나 또한 미쳐갔다. 나의 20대 청춘 연애 이야기다. 그 남자만 아니었어도… (어떤 말을 생략한 것인지 짐작할 뿐이다 ) 라며 안타까워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젊은 시절, 그를 만나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학업 말고 책임질 것이 없던 시절이라 좋았다. 마음껏 아플 수 있었고 오롯이 배울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배신감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이를 악물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 역시 그때 찾아와 주어 감사하다. 모든 인연이 다녀가며 내게 하나씩 내 생에 필요한 가르침을 주고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불러왔다. 

 

주인공만 남은 연극이 있던가? 사라진 인물과 배경 자리에 다른 인물과 장소, 사건이 등장한다. 내 인생의 새로운 스토리를 위해 말이다. (하지만 메인 조연들은 몇 있어 줘야 그 여정이 살만하다 ) 낯선 이가 다시 익숙하고 가까운 이가 되고, 생경한 상황이 사랑스러운 일상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니, 이별 중인 그대여, 새로운 인연을 맞을 준비를 하자.

피천득 <인연> 

 

 

인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수필가이자오월을 사랑하고 오월을 닮은 시인 피천득새로운 디자인, 증보된 내용으로 만나는 수필집 『인연』 시집 『창밖은 오월인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수필가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과 작가의 유일한 창작 시집 『창밖은 오월인데』 개정판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인연』은 한국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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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좋은 나를 준비하자.

 

좋은이라는 단어는 여기저기 붙이기 쉽지만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다.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는 내게 “ 좋은 나” 는 일관성, 신뢰, 그리고 기다림으로 표현된다.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도 일관성 있게 심하면 괜찮다. 예상되기 때문이다. 가장 어려운 사람과 상황은 예측할 수 없고 예측이 빗나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경우다. 일관성을 바탕으로 그 사람과, 그와의 관계에 신뢰가 생긴다. 신뢰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다림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상황도 변한다. 힘든 상황을 마주하면 나란 사람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 나의 가장 추한 면이 활개 칠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답지 않게 행동할 때 우리는 나를 믿고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는 사람을 간절히 원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또는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겠지라는 마음으로 그 파도가 잠잠해지기를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꼭 그런 내가 되고 싶다. 힘든 일을 겪으며 나를 잃고 내 바닥을 마주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더라.  좋은 인연을 만드는 법은 내가 좋은 인연이 되어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나는 나를 준비하려 한다.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 본문 253p 우정-

옷깃만 스쳐야 하는 인연도 있다.

 

인연은 악연도 있다. 새로운 인연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지난날을 돌아봤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이다. 우연히 자꾸 보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 사람이 내 인연이 아닐까? 친구든 남자든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의미를 부여하며 노력하던 인간관계가 악연으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보고 경험했다. 처음부터 이 사람이 내 인생의 좋은 인연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의식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노력했다는 문장에서 악연의 힌트가 있다. 내 마음은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자연스럽게 내 마음이 흘러가는 인연에 내 시간과 관심을 쏟기도 부족한 생이다. 옷깃조차 스치지 말았어야 하는 인연도 있고, 옷깃만 스쳐야 하는 인연도 있다. 내 마음의 레이더를 항시 켜 두어야 한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본문 137p 인연-

내 기대에 작은 돌 하나 얹자.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종종 잡던 나를 보며 마더 테레사 나셨네!”라고 친구가 말했다. 둘이 마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마더 테레사가 아닌데 그런 흉내를 내다가 속상한 일이 참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 “좋은 친구” “좋은 여자친구” 의 기준이 너무 높았다. 나조차도 그 기준을 소화하기가 버거웠으나 이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문제는 그 노력 자체가 아니다. 나는 내 고귀한 기준을 상대에게도 바랐다. 사람에게 단순히 Give & take 물질적인 무언가를 기대한 것이 아니다. “ 사람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라는 기준을 상대에게 투영하며 얻는 상처는 내가 자초한 상처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마더 테레사가 아니란 걸 인정하는 날, 내 기대에 작은 돌 하나를 얹었다. 내게 너그러워지자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졌다.

 

내 기대를 낮출 수 없는 날엔 투자의 기본을 생각한다. 투자하는 순간 본전은 버린 것이다 여겨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투자는 당신에게 불안과 초조만 안겨준다. 내가 주고 싶어 주는 거면 그만이다. 내가 무리해서 줘야 하거나 본전 생각날 것 같으면 결과적으론 주지 않으니만 못하다.  


아플 만큼 아프고 지나가야 상처가 속에서 곪지 않는다.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남기고 간 교훈이다. 본능적으로 나는 내 일상을 채울 사랑스러운 것들을 찾는 노력도 시작했다. 8월 말, 생기가 사라진 나를 제일 처음 웃게 한 것은 나비였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그 속에서 어렴풋이 자유도 보았다. 하지만 그 기운이 내게 오래 남아있진 못했다. 촛불 하나로 밝힐 수 없는 어둠도 있는 법이다.

 

얼마 전 두바이를 다녀왔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야만 하는 일이 있어 꾸역꾸역 갔다. 아직 내가 놓아주지 못한, 지금 내가 누릴 수 없는, 사랑하던 내 일상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어렵게 정 떼며 돌아서는 실연당한 여인이 전 남친을 보러 가야 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이별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떠나는 자와 떠나보낸 자의 입장은 참 다르다. 지난 3개월은 서로에게 너무 다른 시간으로 흘러갔다.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내가 타인의 인생에선 그저 하나의 배역일 뿐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조연이든 잠깐 스쳐가는 행인 1이었든 말이다. 내 빈 자리가 다른 누군가로 채워진 것을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알지만 늘 속상하고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큼 뼈저리게 이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 없다. 그렇게 이별을 온몸으로 느끼자 마침내 현실이 받아들여졌다. 나는 그렇게 이별했다.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습니다                            - 본문 174p 여심 - 

안녕, 그리고 안녕!

 

그제야 비로소 창밖의 단풍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먹고 싶은 음식도 생각났다. 다 사라져 텅 빈 일상이 아닌 새롭게 그릴 하얀 도화지가 주어진 기분이었다. 하나씩 예쁘게 보고, 하나씩 기대하며 찾아 나서야지. 내 마음에 나비가 날아 앉았다.

 

사람만 꼭 맞는 타이밍에 나타나 제 역할을 하고 가는 게 아니다. 피천득의 <인연> 역시 완벽한 타이밍에 내게 찾아왔다. 흩어진 내 마음을 모아 안아주며 앞으로 살아갈 힘과 지침서도 쥐여준다. 이별하는 중이라면 나눠줄 초대장을 받았다는 것도 잊지 말자. 슬픔이 옅어지는 만큼 설렘이 당신에게 스며든다. 미소를 띠며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내 일상에 새로운 인연을 초대하자. 첫 번째 손님으로 피천득의 <인연> 만한 것이 없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본문 192p 나의 사랑하는 생활 

 

ps ) 혈액암 투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허지웅을 보며 격하게 공감했다. 잃어보지 않는 사람은 알 수 없다.일상이 주는 소중함을 누릴 수 없는 삶은 애인과 이별하는 수준의 고통과 차원이 달랐다. 부디 하나하나 마음껏 누리고 살기를!

매일 매일을 별일 있듯 기쁘게 삽시다